빈 깊어가는 겨울, 따스한 나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조금 더 특별한 여행을 원한다면 남인도를 추천한다. 남인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인도’의 이미지와 다소 다르다. 거리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여유롭다. 읽고 쓰는 문자도 북인도와 다르다. 남인도 께랄라 주에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 코친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무역항으로, BC 3세기부터 향신료를 사고팔던 도시다. 바람결에 실린 시나몬 향을 따라, 남인도 코친으로 향한다.
빈 코친은 한때 향신료 무역 중개지로 이름을 날렸다. 코친이 속한 께랄라 지역은 향신료가 잘 자라는 천혜의 땅으로, 카다몬과 커민, 가람마살라가 넘쳐났다. 향신료는 알싸한 향을 솔솔 풍기며, 유럽 사람들을 인도로 불러들였다. 향신료 무역이 부와 권력을 상징했던 시대, 코친은 바다 건너 온 이방인들에게 황금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유럽에서 향신료를 찾아 온 포르투갈 사람들은 코친에 성당을 세웠다. 1503년 건설된 인도 최초의 성 프란시스 성당이 그곳이다. 성 프란시스 성당은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성당으로 지어졌지만, 코친이 네덜란드 영향 아래 들어가면서 개신교회로 사용되었고 이후 영국 지배 때는 성공회당으로 쓰였다.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스코 다가마의 흔적을 쫓아 성당을 찾는 이도 적지 않다. 바스코 다가마의 시신이 12년간 성 프란시스 성당에 묻혀있었기 때문이다. 성당 안에는 바스코 다가마의 묘비가 남아있다. 1498년 코친 북부에 도착한 바스코 다가마는 코친을 향신료 무역의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다 코친에서 눈을 감았다.
빈 성 프란시스 성당과 함께 들러야하는 명소가 마탄체리 궁전과 유대인 마을이다. 마탄체리 궁전은 코친을 지배하던 마하라자가 머물던 궁전으로, 포르투갈 상인들이 건축했다. 마탄체리 궁전에서 나오면, 유대인의 흔적인 빠르데쉬 시나고규 유대교 회당이 있는 유대인 마을로 이어진다. 고즈넉한 회당에 앉아 구석구석 살피다 보면, 인도가 아닌 예루살렘에 와 있는 착각이 든다. 유대인 마을은 골동품점이 모여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현란한 색의 가네쉬 상을 비롯해 두 손 모으고 있는 성모상, 작동하지 않을 것 같은 오래된 전화기까지 작은 골동품 가게 안에 시공간을 넘나드는 물건이 쌓여 있다. 골동품을 구경하며 걷다보면, 코를 자극하는 향이 달려든다. 향신료 시장이다. 쌀자루만한 큰 포대에 클로브와 카다몬, 시나몬, 정향 등 귀한 향신료가 넘쳐난다. 색도 향도 모양도 다른 향신료들. 향에 흠뻑 취해 걷다 보면, 이제야 ‘아, 인도구나’하는 느낌이 온몸에 퍼진다.
빈 코친은 카페에서 한가롭게 책장을 넘기며 향기로운 차 한 잔 즐기기 좋은 도시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도시 전체에 깔려 있으며, 비엔날레가 열리는 ‘예술의 도시’로도 이름이 높다. 향신료를 둘러싼 암투와 분주한 무역이 과거였다면, 현대 미술과 풋풋한 낭만이 코친의 오늘이다. 카페투어를 하고 싶을 만큼 멋진 카페도 줄줄이 이어져 있다. 카쉬 카페(Kashi cafe)와 데이비드 홀(David Hall)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남인도 커피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아트 카페다. 티 폿(Tea Pot)은 알록달록한 찻주전자를 높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다. 유쾌한 인테리어 속에서 맛보는 이국적인 차 한 잔. 수많은 이들이 왜 코친에 반했는지 어렴풋이 감이 온다.
빈 현대미술이 주류를 이루지만, 전통문화를 볼 수 있는 공연도 있다. 남인도 전통 무용인 까따깔리(kathakali)다. 바라트 나트얌, 까딱, 마니뿌리와 함께 인도 4대 무용 중 하나로 꼽히는 까따깔리는 대사가 따로 없는 무언극으로, 음악과 표정, 몸짓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공연 시작 전, 얼굴로 어떻게 감정을 표현하는지 보여준다. 사람의 표정이 다양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표정뿐만 아니라 눈동자로 수많은 마음을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다. 표정과 눈동자뿐만 아니라, 무드라라고 부르는 손동작도 중요하다. 공연이 시작되면, 세 명의 등장인물이 차례로 나와 갈등과 고뇌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화려한 복식과 메이크업은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전통 음악이 깔리고 그 음악에 맞춰 시시각각 변하는 배우들의 세심한 표정과 섬세한 동작, 가끔 터지는 거침없는 괴성까지 어우러져,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다.
빈 코친의 하루는 중국식 어망 감상으로 마무리한다. 중국식 어망은 코친의 아이콘 중 하나로,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이 대륙을 호령하던 시절 코친으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망을 보기 위해 아라비아 해로 나간다. 바다에 거대한 그물망이 줄줄이 널려 있다. 튼튼한 팔뚝을 가진 장정들이 그물을 내린 후, 고기가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그물을 건져 올린다. 잡히는 고기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인간의 힘으로만 고기를 잡아 올리는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여행자들에게는 어망이 늘어서 있는 곳이 일몰 포인트다.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하늘과 삼각형 모양의 어망이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코친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간 수많은 이들의 흔적이 어망에 묻어 있는 것 같다. 파스텔 톤으로 젖어 드는 하늘처럼, 마음속에 코친이 진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다.